[경향신문]

해마(hippocampus)는 구체적인 사건을 기억하는 데 중요한 뇌 부위다. 그런데 2007년에 해마가 손상된 환자들에게는 과거 기억의 회상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상상하기도 어렵다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예컨대 해마가 손상된 환자들에게 아름다운 열대 해변에 있다고 상상하고 상황을 묘사해 달라고 요청하면, 이들의 묘사는 빈약하고 일관되지 않았다. 과거 사건의 기억에 관련된 해마와 새로운 경험에 대한 상상을 연결짓다니 정말 참신한 논문이라고 생각했었다.

■ 뇌를 참고하는 인공지능


이 논문의 1저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무려 9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어떤 연구를 해온 사람이면 알파고 같은 걸 만들 수 있는지 찾아보다가 그 2007년 논문을 발견한 것이다. 그 인상 깊었던 뇌과학 논문의 1저자는 알파고를 만든 딥마인드의 최고경영자 데미스 하사비스였다. 그뿐 아니라 하사비스는 요즘도 뇌과학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인공지능을 만드는 사람이 뇌 연구는 왜 하는 걸까?

인간의 뇌는 인간 수준의 지능을 구현하는 유일한 예시다. 따라서 뇌의 구조와 원리를 참고하면 인공지능 개발에 필요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예컨대 알파고에 사용된 심화 학습은 뇌 신경망을 모방해서 만든 인공 신경망을 사용하고 있다. 뇌 신경망은 부위별로 구조가 다르고, 구조에 따라 기능도 달라지는데, 심화 학습은 여러 뇌 부위 중에서도 시각 뇌의 구조적 특징을 많이 참고하고 있다. 심화 학습을 사용하는 인공지능이 사물 인식에서 특별히 탁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뇌과학만 인공지능 연구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뇌를 참고하는 인공지능 연구는 뇌의 구조와 활동을 계산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사비스의 최근 논문을 통해 뇌의 학습을 살펴보자.

■ 신피질과 해마의 학습

신피질(neocortex)에서는 어떤 자극이 입력되었을 때 활성화되는 신경 세포들의 비율이 10% 정도이다. 자극에 반응하는 신경 세포들의 비율이 10%나 된다는 것은, 이번에 활성화된 신경 세포가 다음에 다른 자극이 들어올 때도 활성화될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나의 신경 세포가 여러 자극에 반응하도록 만들어진 신피질의 구조는 다양한 정보를 통합해서 지식을 구축하기에 유리하다.

신피질의 느린 학습 속도도 지식을 습득하기에 유리하다. 신피질에서처럼 하나의 신경 세포가 여러 자극에 반응하다 보면 이번에 배운 정보가 다음에 다른 자극을 경험하는 동안 지워질 수 있다. 이렇게 새로운 경험이 이전에 배운 내용을 지워버리면 누적된 경험을 통합해서 지식을 습득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학습 속도가 느리면 이전과 다른 자극을 경험하더라도 이전에 배운 내용이 모두 지워지지는 않는다. 운 좋게 이전과 비슷한 자극이 경험되면 이전에 학습한 내용이 강화되기도 한다. 이런 과정으로 얻어진 지식에는 ‘구름은 자주 보이지만 일식은 드물다, 아이스크림과 달달함은 자주 연관되지만, 장미와 식초는 연관되지 않는다’처럼 환경의 통계적인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반면 해마는 어떤 자극이 입력되었을 때 활성화되는 신경 세포의 비율이 약 1%에 불과하다. 그래서 신피질처럼 서로 다른 정보를 통합하기에는 부적합하다. 하지만 서로 다른 사건들을 따로따로 기억하기에 좋다. 해마가 ‘이번 휴가에 있었던 일’처럼 구체적인 사건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구조 덕분이다. 정보를 기억하는 해마는 지식을 습득하는 신피질과는 달리 학습 속도가 빠르다. 해마가 신피질처럼 학습이 느려서야 매 순간 축적되는 새로운 경험을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뇌 속에는 개별 경험을 빠르게 습득하는 해마와, 환경의 통계적 특성이 반영된 지식을 서서히 구축하는 신피질이 협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주 경험되지는 않지만 빠르게 습득해야 할 중요한 지식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 아이가 옆집 강아지와 동화책을 통해서 개는 친근한 동물이라는 지식을 습득했다고 하자. 이 아이가 어느 날 무섭고 공격적인 개와 마주쳤다면, 아이는 무서운 개를 여러번 마주치지 않고도 개에 대한 지식을 수정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 절묘한 보완

우리가 잠자거나 쉬는 동안, 해마는 깨어있는 동안 경험한 일들을 뇌 속에서 빠르게 재생(replay)한다. 예컨대 쥐 한 마리가 A→C→B라는 3군데 위치를 지나서 B 위치에서 맛있는 치즈를 발견했다고 하자. 그러면 이 쥐가 쉬는 동안 해마에서는 A, C, B를 지나는 동안 일어났던 신경 세포들의 활동이 실제 속도의 약 20배로 재생된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재생하면, 시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정보들이 압축되어 신경 세포들이 학습하기 좋아진다. 또 짧은 시간 동안 여러번 복습하기에도 유리해진다.

해마는 경험한 모든 일을 같은 빈도로 재생하지는 않는다. 새롭거나 놀라운 일, 맛있는 치즈처럼 보상이 되는 일, 무서운 개처럼 감정적인 반응을 일으킨 사건들을 더 자주 재생한다. 따라서 신피질까지 전파되는 해마의 재생은 중요하지만 드문 정보를 신피질에 여러번 제공해서, 새로운 정보가 빠르게 기존 지식에 포섭되게 도울 수 있다. 참으로 절묘하지 않은가? 구조가 다른 뇌 부위들이 각기 다른 학습에 참여하고, 감정과 해마의 재생이 이런 협업의 단점을 보완한다니 말이다.

우리는 예외적인 일들, 극도로 무서웠던 경험에 실제보다 큰 가중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해마의 재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경향은 인지 편향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처럼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해마의 재생 덕분에 중요하지만 드문 경험이 빠르게 지식을 수정할 수 있음을 생각하면 신기하고 고마운 일이다. 쭈글쭈글한 외모가 좀 별스럽기는 해도 뇌는 이렇게 기특하고 신통하다.

<송민령 |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정보출처 : http://v.media.daum.net/v/20170821212015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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