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작품의 훌륭함과 그 이면에 있었거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작가의 고뇌를 동시에 봐야 된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뜨거운 여름에, 아담하고 젊은 며느리가, 하얀 머리에 하얀 모시옷을 곱게 입고 하얀 가죽구두를 신고, 완전히 90도로 꼬부라진 시어머니를, 부축하고 가는 장면을 보는 중년이상 사람들은 “기막힌 동양화”라고 감탄한다. 어떤 분들은 나도 저런 노모가 계셨으면 저렇게 걷고 싶다고도 한다. 우리 정서에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높게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며느리가 그 그림을 그리느라고 원형탈모증에 머리가 숭숭 빠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 전 세계의 중요한 거의 모든 분야의 정점에는 유대인이 자릴 잡고 있다. 그 현상을 지금 시점에서 보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그 이면에 이미 그들이 치른 대가를 보면 아찔하다. 그들의 역사는 수 백 년의 노예생활, 포로생활, 뿔뿔이 흩어 진 난민생활에서도 단절되지 않은 독특한 문화와 교육이 있었다. “아하, 그럴 수밖에 없구나!” 하게 된다. 무엇이나 현재만 보아서는 진정한 가치나 진면목을 모를 때가 많다. 그 역사나 배경을 동시에 봐야 본래의 가치를 바로 볼 수 있다.

사람은 가능성의 존재다. 사람의 뇌는 우주에서 가장 복잡하고 탁월하다. 천억 개의 뇌세포와 그들이 정보를 주고받는 천조개의 시냅스가 만들어내는 가능성은 아무도 가늠할 수 없다. 그런 무서운 사람을 두고 흙 수저라고 한탄하고 낙망하거나 아예 포기하고 온갖 부정적인 상상을 하거나, 자신이 흙 수저라며 저주하는 사람도 있다. 깨어나자! 가능성을 보자! 몸부림치자!

아주 절망적인 흙 수저라도, 그게 자신이 선택한 것도, 자기 잘못도 아니다. 특히 기름에 튀겨서 생명이 없는 것도 아니다. 태생 때문인 흙 수저는 가능성 덩어리다. 사람은 창조하는 동물이다. 미래는 창조사회다. 사람에게 이롭거나 안전하게 할 것은 한 없이 많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흙 수저들의 살려는 발버둥이지, 금 수저들의 노닥거림이나 해롱거림이 아니다. 가장 밑바닥을 경험하지 않고 나온 대박이나 대작이 있다면 그 자체도 노벨상 깜이다. 가능성을 준 이에게 감사하고 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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